
10cm
애상말리지마 내 이런 사랑을
너만 보면 미칠 것 같은 이 맘을
누가 알겠어 웨딩드레스 입은
니 곁에 다른 사람이알잖아 너를 이토록 사랑하며 기다린 나를
뭐가 그리 바쁜지 너무 보기 힘들어
넌 도대체 뭐하고 다니니그게 아냐 이유는 묻지마
그냥 믿고 기다려 주겠니
내게도 사랑을 위한 시간이 필요해
널 받아들일 수 있게일부러 피하는 거니
문자 해도 아무 소식 없는 너
싫으면 그냥 싫다고 솔직하게 말해봐말리지마 내 이런 사랑을
너만 보면 미칠 것 같은 이 맘을
누가 알겠어 웨딩드레스 입은
니 곁에 다른 사람이난 두려워 나보다 더 멋진
그런 남자 니가 만날까봐
아니야 그렇지 않아 정말 너 하나뿐야
속는셈 치고 한번 믿어봐우연히 너를 보았지
다른 남자 품 안에 너를
한번도 볼 수 없었던 너무 행복한 미소
내 사랑은 무너져 버렸어그게 아냐 변명이 아니라
그 남자는 나완 상관없어
잠시 나 어지러워서 기댄 것 뿐이야
날 오해하지 말아줘나 역시 많은 여자들
만났다가 헤어져도 봤지만
한꺼번에 많은 여자를 만난 적은 없었어니가 뭔데 날 아프게 하니
너 때문에 상처 되버린 내 사랑
이제 다시는 너의 어떤 만남도
나 같은 사람 없을껄난 두려워 나 역시 다시는
이런 사랑할 수 없을까봐
믿을 수 없겠지만은 니가 첫사랑인데
떠나버리면 어떡하라고사랑까지는 바라지도 않을께
니 곁에 항상 있게만 해줘 제발 제발—
1년반쯤 전엔가, 어떤 자리에서 “(대학생치곤) 나이가 많아서…”라는 이야기를 했다가 물의(?)를 빚은 적이 있었다. 휴학기간이 좀 길었던 탓에 수업시간마다 고학번 복학생에 축에 속했던 터라 그런 생각을 별다른 자각없이 갖고 있었던 것 같다. 문제는 내가 그 자리에서 가장 어린 축에 속했던 것. 모 판사님은 꽤 오랫동안 이 말 실수를 가지고 날 놀리셨다.
어쨌든, 이 사건 이래로 내 나이와 나이에 대한 내 생각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내가 나이 많은 축에 속하는 집단에서건 아주 어린 축에 속하는 집단에서건 상관없이 그런 말은 하지 않게 되었다. 내 나이가 완연한 노년기에 접어들지 않고서야 나이가 많다는 것은 결국 상대적인 기준에 따른 것일 수 밖에 없는 데, 그 때 내가 “나이가 많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마찬가지로 그 이후부터 “이제 나이가 많아서…”라는 말을 들으면 상대방을 한 번 더, 들여다 보게 된다. “나이가 들어서…”라는 말은 보통 인격적인 성숙보다는 (매 상황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돌이킬 수 없는 선택, 순수함의 상실이라던가, 사회 경험에 따른 변화, 또는 신체적/정신적 노화와 연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상황을 바라보는 하나의 태도이지는 않을까?
그래서 “그렇게 나이 많지 않아요”라고 말해주고 싶어진다. 보통은 말하기엔 조심스럽기 때문에 실제로 말을 꺼내는 일은 드물지만, 상대방이 내게 의미 있는 사람일 수록 그 순간을 마음에 담아둔다.뭐, 그렇다고 영원히 철없는 아이로 살자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인 나이의 많고 적음 보다는 역사/문화적인 맥락에서 어떤 지점을 거쳐 왔는지 찾아보고 확인해보는 게 더 재미있고 의미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 뿐이다. 예를 들어, 당신의 90년대 중반은 어땠는지, 나의 90년대 중반은 어땠는지 같은 것. 세대 차이를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라 퍼즐 맞추기를 하는 기분으로 말이다. 점점 나와 아래로 7~10살 이상 차이가 나는 사람들과도 만나게 되는 일이 늘어나면서는, 거꾸로 내 주변에 (상당히 많이 존재하는) 나보다 7~10살 이상 나이가 많은 분들이 나를 얼마나 격의 없이 대해 주시는지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일이 많아지곤 한다. 물론, 나이가 들어갈 수록 나이 차는 갈수록 의미가 옅어진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지난 월요일, 올해부터 매주 월요일마다 갖는 모임에는 사정상 불참한 분들이 많아 N님과 나만 참석했다(그리고 N님의 남편, K님도 잠시 머물다 가셨다). 한가해진 김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어쩌다보니 이야기가 결혼 10년차 부부인 N님과 K님의 연애담으로 흘러갔다. 90년대 중반, 캠퍼스 커플로 맺어져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이야기, 핸드폰(휴대전화)도 없었던 시절에—삐삐(무선호출기)는 있었지만—미국과 한국으로 “편지”를 주고 받으며 연애하는 어려움(지금과의 차이?)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커뮤니케이션 채널의 변화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영향을 준 것들과 그 커다란 변화에도 바뀌지 않은 것, 더 나빠진 것 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쓰면 너무 내 전공식으로 해석한 게 되어버리는데, 실제로는 다른 이야기도 많이 했다. 서로가 참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결혼한지 5년이 흐른 후에야 깨닫고/서로 인정했다거나, 비폭력(NVC)가 어떤 시점에서 큰 도움이 된 이야기 등등. 나도 이야길 듣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로 들은 이야기만 남긴다— 그때 문득 그날 아침 피트니스클럽에서 들었던 이 노래를 떠올렸던 것이다.
쿨은 한국에서 90년대 중후반을 대표하는 대중가요 그룹이다. 쿨이 활동하던 시기는 한국에서 대중문화가 10대와 20대 초반 젊은 층을 중심으로 옮겨가며 폭발적인 성장을 하고 있을 시기였지만, 또한 거리가 한산해질 정도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던 드라마 모래시계의 방송으로부터 그리 오래 지나지 않은 시기이기도 했다. 다시 말해 그 시기를 지나친 많은 사람들이 쿨에 대한 기억을 공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이 노래 <애상>이 실린 쿨의 4집은 아마 내가 아주 초기에 샀던 CD 가운데 하나일거다. (4.5 집까지, 쿨은 딱 두 번 사고 말았지만.) 그래서 참 많이 들었다.
이 음원은 쿨의 원곡이 아니라 10cm가 커버한 것으로 ‘윤일상 작곡가 21주년 기념 앨범(싱글?)’에 실린 것이다. (프로듀싱은 윤일상 본인이 직접 한 모양이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쿨의 이재훈이 아니라 10cm의 보컬 권정열 목소리 같다 느꼈는데 확인해보니 역시 맞았다. 운동을 하면서 별 생각없이 듣던 차에 한 대목이 머릿속에 걸렸다.
“문자 해도 아무 소식 없는 너”
14년여 전에 발표한 원곡의 이 부분 가사는 분명 “삐삐 쳐도 아무 소식 없는 너” 였다.
십여년이 넘는 시간이 흐르면서, 편지 혹은 무선호출기에 뜨는 번호와 공중전화에 줄서서 기다리며 들었던 음성사서함 메시지는 SMS가 되었고, 이제는 또다시 카카오톡, What’s app, iMessage로 바뀌어 가고 있다. 며칠 전 읽은 책에서 러시코프는 기술마다 다른 속성, 즉 편향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에 따라 우리 또한 다르게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삐삐, 음성 메시지와 문자는, 문자와 카카오톡은 어떤 차이가 있고, 그 차이는 그걸 쓰는 우리들을 어떻게 바꾸어 왔을까?
하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바뀌지 않은 것들에 대해 더 생각해보고 싶다. 적어도 이 노래를 듣는 지금 이 순간에는 말이다.사람들은 집에 돌아갈 때 하늘의 샛별을 보고 쓸쓸하다고 생각한다. 이상한 일이다. 이제는 지구 반대쪽에 있어도 배타고 한달 반 가야 만날 수 있고, 편지 보내면 한 달 넘어 답장 받는 시절도 아닌데도 외로움이 줄지 않았다니.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휴대폰이 있고,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켜면 메신저가 있고, 집에 가면 전화가 있는데도. 채널이 많아지면 그 채널을 통해 이어지는 관계만큼 닿을 수 없는 관계도 실감하게 되고, 좀 더 가까워진다고 해도 더욱 가까워지지 않음을 슬퍼하게 된다. 용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길이 있는데도 가서 만날 수 없기 때문에.
닿지 않을까봐 길을 만들지 않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사람들은 그래서 계속 계속 닿을 수 있는 길을 만든다. 그렇다고 해도 외로움이 줄지 않음은 필연, 방법이 늘어난다고 해도 완전한 연결이 없듯이 계속 좌절하는 통화가 나오는 것이다. 좌절하는 블로그. 좌절하는 편지. 좌절하는 문자. 통하기 위해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따라 갔다가 돌아 나오면서 좌절하는 게 사람. 그래도 또 언젠가 같은 길이든 다른 길이든 돌아가겠지만…… 어쩌면 우리가 만드는 의사소통의 채널은 네모 반듯하게 구획된 신도시의 거리가 아니라, 아리아드네의 실로도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미로와 같은 건지도. 그러니 길이 많아지면 많아질 수록 나갈 수 있는 길만큼 잃어버리는 길도 많은 게 아닌가.”
- 박현주(milkwood), ‘채널의 확대와 좌절된 통화’. 내 블로그글 ‘닿지 않아도,‘에서 재인용.
아직까지 나는 이 말에 더 보탤 말이 없다. 문자가 오든지 오지 않든지, 카카오톡 답장이 빨리 오든지 늦게 오든지 간이 그것이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얼마나 가까운지를 나타내 줄 수는 없다. 그러나 언제든 문자와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스마트폰은 마치 지금 이 순간, 특별한 용건은 없지만 상대방을 궁금해하는 나에게 당장 메시지를 보내도록 요구하는 것만 같다. 어느 때는 저항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결국 그 요구에 답하듯 메시지를 보낸다. 그러다 답장이 오지 않으면, 연결되지 않으면 (별일 아님에도) 좌절할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다만, 나이 들어갈 수록, 바빠질 수록, 삶이 정해진 틀에 가까워질 수록 비슷한 상황—예를 들어 연결의 좌절—을 두고, 외로움을 갈수록 덜 느끼게 되는데(절대 사라지진 않는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어떤 면에서는 좋은 일이고, 대체로는 조금 나쁜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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